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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김정희·채제공이 지킨 오대산사고, 다시 실록·의궤를 품다
    입력 2025.05.0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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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경제 ] "굽어보니 온 길 가까워 보이지만 / 모르는 사이 아득한 곳 들어왔네 / 봉우리 반은 온통 흰색에 잠기고 / 숲 끝은 아스라이 청색으로 꾸몄으며 / 법 구름은 밖에서 보호해 주고 / 신성 불은 설교 듣는 걸 지켜주네 / 바위 골짜기에 남은 땅 넉넉하니 / 무슨 인연으로 작은 정자 지을까."

1992년 복원된 오대산사고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에 수록된 '포사등오대산'이다. 1823년 예문관(藝文館) 검열 자격으로 오대산사고에 머무르며 지었다. 오대산사고는 왕실 기록을 보관하려고 1606년 세운 외사고(外史庫)다. 산어귀에서 30리나 들어가야 할 만큼 깊은 산중에 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를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자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에 조성해 실록을 봉안했다.

김정희는 이곳에서 실록들을 꺼내어 바람에 말리는 '포쇄' 작업을 했다. 관련 기록은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지난 1일 처음 공개한 강릉 오죽헌의 옛 방명록 '심헌록'에서 확인된다. 포쇄를 마치고 오죽헌을 다녀갔다는 내용을 트유 옹골진 글씨체로 써놓았다.

오대산사고는 산속에 있어 주기적인 포쇄가 필요했다. 항상 과다한 습기에 노출돼 있지만 장서 시설이라서 불을 때는 온돌을 설치할 수 없었다. 김정임 조선왕조실록박물관장은 "조선왕조는 사고 소장 서적들의 습기를 제거하고 안전한 보존을 위해 정기적으로 사관을 파견해 포쇄를 진행했다"며 "주기는 원래 2년에 1회가 원칙이었으나 자연재해와 사관 부족으로 지켜지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설명했다.

'심헌록'

영의정 등을 지낸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1720~1799)도 이곳에서 포쇄한 경험이 있다. 1749년 예문관 검열 직책으로 파견돼 실록을 관리했다. 당시 감회는 시문집 '번암집(樊巖集)'에 담은 '사각포쇄'에서 엿볼 수 있다.

"신선의 산이라 신령함 쌓였는데 / 석실은 산 한가운데 차지했네 / 귀신이 문 걸어 출입 금하고 / 서적은 구름처럼 쌓여 있네 / 관리들 수레 동으로 행차하니 / 포쇄하라 왕께서 명한 때문 / 귀한 책 차례로 열람하니 / 밝은 햇빛 종일 숲 비추네."

이들의 갖은 노력은 일제의 침략으로 무색해졌다. 1909년 궁내부 사무관 무라카미 류키치가 오대산사고를 찾아 포쇄하고 현황을 조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관된 서적들은 서울로 옮겨졌고, 실록과 일부 의궤는 일본으로 반출됐다.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대거 소실됐다. 오대산사고도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번암집

일본에 남은 실록과 의궤는 정부와 국회, 민간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6년과 2011년 국내로 돌아왔다. 한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오대산사고도 1992년 사각과 선원보각이 복원됐다. 이를 기념해 2023년 11월 개관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은 조선왕조 500년의 숨결을 간직한 보고(寶庫)다. 아픈 과거를 딛고 돌아온 실록과 의궤 원본을 통해 선조들의 집념과 문화유산의 가치를 전한다.

지난 1일 전관 개관과 함께 연 '오대산사고 가는 길'은 그 시작을 알리는 기획전이다. 오대산사고의 설립과 운영, 쇠퇴의 역사를 기록유산 약 마흔 점과 전시·교육 콘텐츠를 통해 돌아본다. '성종실록 권 83-87', '선조실록 권 1-2', '가례도감의궤', '심헌록' 등이다. 다만 환수한 실록 일흔다섯 책과 의궤 여든두 책을 모두 감상할 수는 없다. 실록은 열두 책, 의궤는 스물네 책만 들어와 있다. 대부분은 여전히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김 관장은 "보존연구동을 신축해 한층 안전한 지하 수장고가 완비되면 옮겨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면 이관까진 적잖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수장고와 보존과학실 용도의 건물 증축안이 지난 연말 계엄령 선포 뒤 예산 협의 불발로 무산됐다. 월정사에서 사실상 무료로 부지를 제공하나 공사 등에 약 200억원이 필요하다. 김 관장은 "이르면 5년 내 신축을 기대한다"며 "그때까지 교육·전시 허브로 자리를 잡아 오대산 관광의 한 축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평창=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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